온기가 머문 페이지

삶은 영화처럼 선명한 악당과 정의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사람을 남기고 보내는 과정도, 정치의 절충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동시에 조직과 사회 전체의 생존 논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Nothing personal”이라는 말은 상처를 지워주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인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악의만으로 움직이기보다 두려움, 책임, 생존, 압박 속에서 행동한다. 개인에게는 재난 같은 일도 거시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 혹은 “문제가 해결된 상태”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인간 사회는 거대한 equilibrium위에 세워져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믿으며 행동하지만, 그 행동들이 겹쳐질 때 개인적으로는 불합리하고 잔인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Nash 균형이나 Pareto 효율처럼, 완벽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더 움직일 이유를 잃은 상태. 그것은 반드시 정의롭거나 따뜻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는 그것을 “작동하는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 안에 속한 개인은 울분을 느끼지만, 시스템은 이미 안정을 찾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시적으로는 감정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거시적으로는 점점 더 단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입체적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멀리 있는 집단은 쉽게 추상화한다. 다른 팀, 다른 조직, 다른 진영은 어느새 얼굴 없는 집단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적과 위협을 만들어낸다. 직접 얼굴을 보고 웃고 식사를 나누었다면 인간적으로 이해했을 사람도, 집단의 이름 아래에서는 “저쪽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두려움과 단순화를 이용해 더 큰 갈등을 만들기도 한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전면에 드러나는 역할과 그렇지 않은 역할, 그리고 조직이 커지며 생겨나는 운영과 관리의 체계들. 모두가 필요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신분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어떤 말은 실제 오만과 권력의식에서 나오고, 어떤 말은 단지 바쁜 상황 속에서 감정이 제거된 채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메시지 자체보다 맥락과 위계를 함께 읽는다. 그렇게 조직 안에는 불필요한 감정의 골이 생기고,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기능과 역할로만 바라보게 된다.

나는 이런 현실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치열하고 처절한 환경 속에서 뛰어난 제품과 서비스는 태어난다. 그리고 경쟁과 압박은 실제 결과를 만든다. 누군가는 그런 환경에서 성장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고객에게 큰 가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치열함 속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남은 잔열들을 오래 붙잡아보게 된다. 누가 평소에 어떤 말을 했는지, 압박 속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줬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지만, 결국 사람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작은 장면들이다.

예전 누군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다른 사람을 밟고, 배신하고, 고의로 상처 주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지만,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매우 가깝다고 믿는다. 현실의 경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완전히 소모품처럼 대하지 않는 방식. 나 역시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얄팍한 경쟁심과 질투 속에서 의미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가능하다면 사람을 오래 알고 싶고, 오래 품고 싶다. 회사에서 내가 만든 음식을 나누고, 여행을 다녀오면 작은 기념품을 사오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조차 결국 관계를 위한 투자이자 계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생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단지 내가 편안한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싶고, 관계 속에 효율 이상의 무언가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모든 관계가 오래 남지는 않는다. 나 또한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 움직인다. 잊거나 외면해서가 아니라, 나 역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걸어간다. 어느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단지 나와 함께하던 한 페이지가 끝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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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오래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