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오래된 모습
영화 <The Life of Chuck> 속 Chuck은 삶이 끝을 향해 가는 와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갈망하며,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Source: Amazon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을 남기고, 더 자주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더 설명되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영화 <The Life of Chuck> 속 Chuck은 삶이 끝을 향해 가는 와중에도 사랑을 갈망하고, 가족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며,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 앞에서 망설이고, 키를 의식해 깔창을 넣고, 원래는 아무렇지 않았던 신발이 어느 순간 갑자기 불편해진다. 그러다가도 음악이 흐르는 순간에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 춤을 춘다. 사람은 어쩌면 그런 작고 복잡한 감정들의 축적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같은 단어가 항상 같은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이라는 것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끝내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감각 사이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바라보는 별과 행성들은 수많은 광년 떨어져 있고, 그들이 바라보는 지구 또한 오래전 모습일 것이다. 빛이 닿기까지 시간이 걸리듯, 인간도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늘 뒤늦게 이해하며 살아간다. 어떤 감정은 지나간 뒤에야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어떤 순간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오랫동안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사람은 더 단순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어떤 기억은 이미 끝난 일인데도 오래 남아 있고, 어떤 불안은 이유를 알아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했다고 믿고, 아이는 스스로를 다르다고 느끼지만, 정작 자기 자신조차 끝내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내가 익숙했던 동기부여는 대체로 비교 위에 놓여 있었다. 너는 부족한 것이 없다, 누군가는 너보다 더 힘들게 살아간다, 그러니 지금의 삶에 만족해야 한다는 말. 행복은 종종 타인과의 거리 속에서 설명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의된 만족은 내 세계와 완전히 겹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해석하는 데 익숙해졌다.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러면서도 인정에 기대어 나 자신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빠르게 변하는 금융업계에서는 짧고 간결한 설명이 더 큰 힘을 가진다. 우리는 성기게 짠 그물을 던져 가장 큰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물고기들만이 바다의 전부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망원경으로 보이지 않는 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숫자와 확률로 환원되는 환경 속에서, 때로는 나 자신마저 하나의 결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탐구하려 한다. 끝에 분명한 답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사람이라는 존재에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끝내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많은 데이터를 남기고, 더 빠르게 세상을 분석하며, 더 자신 있게 인간을 정의하려 한다. 그런데도 어떤 기억과 불안, 애정, 그리움, 그리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은 논리보다 오래 우리 안에 남아 있다. Chuck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의 삶은 완전히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함 자체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