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 있다

주인공 황동만은 산에 올라가 자기 이름을 외친다. 처음에는 우스웠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오래 남는다. “나 여기 있다.” “너희가 나를 모른 척해도 나는 살아 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고 외치지는 못해도, 적어도 어느 누구 한 사람에게는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은 마음.

드라마를 보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도 나와 비슷한데. 저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는 잘난 친구 앞에서 괜히 더 떠들고, 누군가는 뒤처졌다는 생각에 허세를 부리고, 누군가는 상처받기 전에 먼저 거만해진다. 드라마는 그 모습을 조금 크게 보여줄 뿐, 누구도 완전히 낯설지 않았다.

황동만은 가까이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함께 맥주를 마시면 피곤할 것 같고, 친구라면 몇 번은 크게 다투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미워하기는 어렵다. 그의 요란함 뒤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질투 뒤에는 초라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를 변명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실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상처를 주는 사람 역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무가치함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결핍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결핍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무가치함으로 번역한다. 세상이 나를 그렇게 읽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나를 그렇게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농담을 하고, 영화를 찍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모두 다른 언어를 쓰지만 결국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사람들을 쉽게 놓지 못한다. 오래된 관계를 앨범처럼 간직하고, 멀어졌던 사람에게도 문득 안부를 묻게 된다. 왜 그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들의 삶에 내가 있었다는 것, 내 삶에도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잃고 싶지 않다. 돌아보면 그것도 하나의 아우성이었다. 산 위에서 이름을 외치는 대신, 나는 사람을 통해, 글을 통해, 내 행동으로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을 말해 왔다.

드라마는 결국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갈등은 남아 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미숙하다. 그런데 다소 빠르게 다가온 마지막은 희극이다. 나는 그 결말이 좋았다. 언젠가 완벽한 사람이 되어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찌질하고, 얕고, 서툰 채로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상처를 자식에게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은 여배우도, 삶의 목적을 묻지만 정작 자신도 그 답을 알지 못한 채 황동만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형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쉽게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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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모델